누에바 깐씨온(NUEVA CANCION)과 메르세데스 소사


1960-7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노래운동은 한국의 1980년대 정세와 노래운동에 비교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우리보다 10여 년 앞서 전개된 이 노래운동에서 역사는 보편적 진리를 가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부터 누에바 깐씨온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냉전 이데올로기 시대, 동서 양 진영은 철저하게 서로 다른 색깔로 무장한 채 모든 부문에서 영역 싸움을 해나갔다. 1차 대전, 2차 대전 후 팍스 아메리카나를 공고히 해나가던 미국은 소련의 세력확장에 대해 세계평화 수호자로서의 역할에 따른 명분과 실력을 행사하였다. 20세기 중반 이후 정치적 격변기에 미·소는 한치의 양보 없이 세를 굽히지 않았다. 그 가운데 제3세계 문제는 미국과 소련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항상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며 분쟁을 낳았다. 거기엔 한반도 남북분단을 비롯해 베트남 전,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과 반혁명들이 이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념대립의 구도 속에 온전한 제3세계는 없었다. 미국은 좌파정부의 수립을 좌시 하지 않았으며 반공을 위해서라면 군사쿠데타 지원도 뒤로 미룰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소련 붕괴 이후 지금까지도 미국과의 제반관계에서 미국에게서 등을 돌릴 수 있는 라틴 국가는 많지 않은 실정이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반정부세력,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그리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뿌리깊은 이데올로기 대립이 낳은 예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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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lp Nicaragua!"

우나 빠니아가 作(Una Paniagua, 1985)

"노래없는 혁명이란 있을 수 없다!"

누에바깐씨온은 아르헨티나의 시인이자 음악인인 아따우알빠 유빤끼(Atahualpa Yupanqui)에 의해 1940년대부터 민속자료의 수집과 연구에서 비롯되었으며 전통 민속의 회복 운동 적 성격을 띠고 출발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운동의 시발점은 1970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의 출범 전후로 볼 수 있으며, 보다 근원적인 동력은 쿠바혁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1898년 쿠바는 독립운동가이며 혁명의 순교자인 호세 마르티(José Marti) 가 이끈 독립운동의 결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자본이 개입하고 대부분의 산업기반이 미국의 소유가 된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친미정권은 민중의 삶과 이반된 채 부패의 깊은 골을 형성한다. 이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가 이끄는 160 여명의 게릴라는 1,000명의 수비대가 지키는 몽카다 기지를 급습하지만 탈환에는 실패한다. 호세 마르티 탄생 100주년 기념일인 1953년 7월 26일이었다. 계속되는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다 그로부터 5년 뒤 1959년 1월1일 바티스타 정권이 무너지고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 (Che Guevarra, Ernesto)와 함께 혁명을 완수한다. 바로 이 쿠바혁명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정치영역 뿐만 아니라 제반 문화운동에 대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문화혁명으로서의 촉매제가 되기도 하였다.

쿠바혁명과 더불어 간과해선 안 될 사실은 해방신학을 비롯한 매판자본론, 종속이론 등 일련의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이다. 유럽의 전통 신학을 라틴아메리카의 정치경제, 사회적 상황에서 비판하고 재해석한 해방신학은 페루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erez)신부에 의해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과 결합하여 형성된다. 이는 라틴아메리카 최대 해결과제인 민중의 빈곤문제에 대해 인식의 자양분을 제공함으로써 혁명의 사상적 무기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정치경제적 현실 속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연대감을 형성한 누에바 깐씨온은 민족주의 정신의 파고를 타고 지식인과 예술가의 집단적 문화운동으로 표출되었으며, 미국의 팝과 록에 젊은층의 관심이 옮겨가는 과정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민족 문화의 발굴과 보존에 대한 자각으로 활성화 되었다. 한편 이 새로운 노래운동은 칠레와 아르헨티나 등지에 머물지 않고 쿠바에서 진행 중이던 새로운 노래운동 Nueva Trova(대표적 가수: Pablo Milanés 와 Silvio Rodríguez) 에 영향을 끼쳤으며 혁명의 무기로서 니카라과, 엘 살바도르에 제공되었다. 또한 대 베트남전에서 패한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계기와 맞물려 미국 내 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누에바 깐시온은 라틴 아메리카에 동시다발적이며 자연적으로 발생한 데 그 공통된 특징이 있다. 앞서 언급한 쿠바의 누에바 트로바와 아르헨티나의 Nuevo Cancionero Argentino, 브라질의 Nova Musica Popular Brasileria 등은 새로운 노래운동의 같은 개념의 다른 이름들이다.  

민중이여 단결하라! 우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끝끝내 승리하리라. 

누에바 깐씨온의 본고장 칠레의 당시 정치경제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이 새로운 노래운동의 의미와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칠레의 간략한 현대사는 다음과 같다.

1844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칠레는 1932년을 전후로 여러 차례의 쿠데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불황에 시달렸다. 이후 민주적 정권 교체가 좌우익을 오가며 이루어졌고, 1964년에 기독교민주당(PDC)의 에두아르도 프레이 대통령 취임하였다. 이후 1970년까지 칠레의 국내 정치경제 상황은 신제국주의론, 매판자본, 종속이론 등에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실제상황이 악순환의 고리를 연결하며 발생한다.

1970년 당시 칠레는 초석과 동(구리)의 세계 최대 산지였으나 미국, 영국 등 외국 광산회사들이 독점적으로 지배권을 가지고 있어 이득의 대부분이 해외로 유출되었다. 미국 30대 다국적기업 중 24개 기업이 칠레 진출해있었고 은행을 제외한 18대 칠레 기업이 미국의 자회사였다. 또한 국내적으로도 지주와 지배계층이 전 경작지의 4/5를 차지함으로써 토지 없는 농민들이 도시로 유입되었고 수도 산티아고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가속화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지배계층인 지주, 산업자본가, 교회 등 기득권 보수세력은 민주선거에 의해 좌파로 정권이 이양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1970년 9월4일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당시 62세)가 36.3%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세계 역사상 최초로 민주선거에 의해 사회당 정권이 창출되었다.

[아옌데에 대해 짧게 소개하면, 그는 14세부터 구두수선공이던 무정부주의자 후안 데르마치를 통해 바쿠닌의 저작 등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1926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으며 의대학생회장으로 선출된다. 1932년 사회당에 입당하고 1937년 하원의원에 당선 된다. 1938-42년 보건장관을 역임했고, 1945년부터 1970년까지 네 차례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상원부의장과 의장을 지냈다. 이 사이 1952년,1958년, 1964년 세차례 사회당 또는 인민연합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다.]

당시 선거운동에 누에바 깐씨온 음악인들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50년대 후반부터 두각을 나타낸 누에바 깐시온의 어머니 비올레따 빠라로부터 영향받은 빅토르 하라와 인티-이이마니(Inti Illimani : 께추아어로 "이이마니山의 태양"), 낄라파윤(Quilapayun : 마뿌체어로 "세 명의 수염을 기른 사람"이란 뜻), 야뿌(Illapu : 께추아어로 "천둥·번개") 등의 그룹들이 그들이었다. 또한 같은 대륙의 음악인들도 이 새로운 노래운동에 참여한다. 우루과이의 다니엘 비에리티와 알프레드 시타로사, 페루의 왈츠의 여왕이라 일컬어진 차부가 그란다, 멕시코의 안파로 오초아와 로스 르크로리스타스, 쿠바의 실비오 로드리게스 등이 그들이다.

제국주의적 착취의 근절과 독점타파, 그리고 농지개혁 등은 아옌데 정권이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리하여 구리광산, 철강 및 석탄 산업 , 은행 등 주요 산업을 전면 국유화하고 임금인상을 추진한다 . 특히 해외자본의 외국회사들을 국유화함으로써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반감을 산다. 미국의 통신회사 ITT(International Telephone & Telegram)의 국유화 조치는 칠레의 사회주의화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미국 국가안보회의(당시 의장: 헨리 키신저 안보담당특별보좌관)의 칠레에 대한 물밑 작전이 감행된다. 즉, 비축 구리를 방출시켜 구리의 국제시장가를 15.7% 하락시킴으로써 칠레로 외화유입이 차단되고, 계속해서 미국은 대외차관통로를 봉쇄함과 동시에 칠레의 미국산제품수입이 격감된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은 반(反)인민연합세력과 군부를 지원함으로써 아옌데의 지지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미국의 경제봉쇄조치로 1973년 1월에 인플레이션 150%에 달하는 등 경제적 고통이 심화되었다. 4월 광산노동자 파업, 의사·법률가·건축가 등 일련의 중산층이 반(反) 아옌데 세력으로 형성됐으며, 인민연합 내부에서 개혁의 혼선이 빚어지는 등 아옌데의 점진적 개혁노선이 한계를 노정한다. 결국 CIA가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마련된 셈이었다.
 
1973년 3월 인민연합이 의회선거에서 과반수 지지를 획득하게 됨으로써 아옌데의 신임투표를 계획한다. 9월 11일 신임투표계획 발표예정일이었던 그날 아침, 미국의 지원을 받은 육·해·공 3군, 경찰대의 연합쿠데타가 발생하고 군사평의회는 의장에 피노체트 육군총사령관을 선출한다.

한편 아옌데 대통령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대통령궁을 떠날 것을 명령하고, 그의 딸들은 강제로 대통령궁 밖으로 나오게 된다. 경찰이 쿠데타 세력에 가세함으로써 모네다 궁전을 지키던 방위군은 방위군 사령관의 철수명령에 따라 대부분 대통령궁을 빠져나갔다. 아옌데 자신은 남은 몇 명의 경호원들과 쿠데타군에 맞서 모네다 궁전에서 끝까지 자동소총을 들고 항전하다 타계하였다.(당시 군부는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누군가 이 암울하고 쓰라린 순간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 쿠데타군에 포위된 채 행한 아옌데의 마지막 방송연설 중 --

곧이어 쿠데타 이후 아옌데에게 협력했거나 인민연합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국외 강제추방, 구금, 고문, 사형집행 등 가혹한 탄압이 자행되며, 누에바 깐씨온 운동에 참여한 음악인들도 마찬가지로 시련을 겪는다. 군부 쿠데타로 자국민뿐만 아니라 해외 음악인들도 본국으로부터 체포, 감금, 즉결 사형, 해외 강제추방 등 사회주의 이념을 뿌리 뽑으려는 메카시즘은 철저하게 실행된다. 키에타노 부아르조와 시코 바르키는 국외 망명, 우루과이의 아니발 산파조는 행방불명되었고 1972년 자신의 노래로 구금된 다니엘 비에리티도 때를 맞춰 이 시절에 추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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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관저에서 촬영된 아옌데 대통령의 마지막.                          
(오른쪽) "계급투쟁(Class struggle)" Cesar Olhagaray 作(1983) 미국 자본의 침략에 대항해 싸우는 인민연합의 투쟁을 그린 것인데,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란 누에바 깐씨온의 구호를 반영한 기타 부분이 인상적이다.


MERCEDES SOSA - GESTOS DE A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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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의 프로필

-1935년 7월 5일 아르헨티나 북서부 전통문화 보호구역 투쿠만에서 태어남, 아르헨티나 민속음악의 어머니

15살 방송국에서 개최한 아마추어 컨테스트에서 우승하면서 가수의 길로 접어듬

1966년 아르헨티나 코스킨 페스티발에서 우승, 필립스 레코드 계약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라 일컬어지는 Violetta Parra, 그리고 누에바 깐씨온의 선구자 Atahualpa Yupanqui 등, 1960 년대에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통해 저항 음악의 출현을 예고했던 이른바 "nueva canción”운동에 크게 영향받음.

(CIA의 후원을 받은 쿠데타 세력은 1973년에 민주주의 선거로 당선된 칠레의 대통령 Salvador Allende를 축출한다.)

1976-83 7년간 "Dirty War" 이 기간 동안 9,000-15,000 명 행방불명

소사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와 폭력에 저항하는 노래로 아르헨티나 민중의 지지를 얻는다. 그러나 이는 곧 군부에겐 반정부적 걸림돌로 규정되고 소사는 요주의 인물로 지목된다. 마침내 1975년에 그녀는 체포되었다.

죽음에 대한 위협들로 인해 그녀는 1979년에 아르헨티나를 떠난다.
1979년 망명하여 1982년 까지 존 바에즈, 밥 딜런, 해리 벨라폰테 등과 전쟁의 만행을 고발하는 컨서트 가짐 1982년 2월 군정종식과 더불어 3년간 국외추방을 당했던 소사는 고국으로 돌아온다.
소사는 Atahualpa Yupanqui와 록 가수 Tito Paez 같은 다양한 음악가들과 교류했다.
인권을 위한 그녀의 투쟁과 라틴 아메리카의 독자적 정체성 추구는 그녀를 누에바 깐씨온 최고의 해석자라는 반열에 올려놓음.

민족음악의 어머니로 전세계의 음악팬들에게 칭송 받는 가수가 바로 아르헨티나의 메르세데스 소사이다. 그 동안 무성한 소문아래 그녀의 앨범들이 제3세계 음악 매니아와 올드팬들에게 엄청난 가격으로 거래되곤 했다는데, 90년도에 87년 발표작이 국내에 라이센스로 소개되면서 그녀의 소문과 칭송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입증시켜 주기도 했다. 그 후 별 다른 앨범이 나오지 않다가 몇 년 전에 92년 작과 93년 작, 그리고 94년에 다시 수입되면서 오랫동안 간절히 애태워 왔던 아시아의 작은 나라 팬들의 갈증을 약간이나마 해소시켜준 바 있었다.

소사의 대표곡 소개

①Mon Amour (내 사랑)- 콧날을 시큰하게 하는 맑고도 슬픔이 베인 피아노 반주에 그녀의 사랑이야기가 담긴 노래는 곧바로 듣는이의 오감을 사로잡는다. 마치 마술처럼 빠져드는 것이다. 뭔가 음률로써 압축된 것 같은 서정성은 차가운 감성과 변화무쌍한 감각을 가진 현대인들의 마음에 참사랑의 의미를 싹트게 할 정도이다. 아들을 둔 어머니처럼 포근한 감동을 전하는 이 곡은 내가 옛날에 들었던 심야 방송에서 소개된 적이 있는 명곡이다.
 
②El Puente De Los Suspiros (탄식의 다리)- 퓨전 재즈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게 정통 라틴팝이구나. 라고 저절로 느껴지게 하는 곡으로 나이에 걸맞지 않은 상큼한 목소리에 탄복을 자아낸다. 이 곡을 듣다보면 짜증나는 일들은 사라지고 마냥 행복감에 젖어든다. 

③Como Dos Extraños (남들처럼)- 피아노의 반주와 아코디언이 함께하는 이 곡은 이국적인 느낌과 함께 친근함을 가지고 있다. 너털웃음을 자연스럽게 내기도 하는 기운찬 그녀의 보컬은 열정 있는 가창력으로 나의 귀를 머물게 한다.  

④De Fiesta En Fiesta (환희와 환희)- 바이올린의 가녀린 음색과 더불어 라틴음악으로 들어간다. 단조의 선율을 바탕에 두고 있지만 민속 타악기(라고 생각되는 악기)가 창출하는 독특한 리듬성으로 그녀의 음악에 박자를 맞추게 된다.

⑤Un Vestido Y Un Amor(드레스와 사랑) - 인간의 본성을 다시한번 자각케하는 힘으로 충만한 따스하면서도 아름다운 곡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후련하다. 아르헨티나의 신세대 싱어송 라이터라는 fito paez의 곡. 

⑥Los Mareados (사기꾼)- 남성가수가 참가하여 대화하는 듯한 노래가 이어진다. 악곡의 드라마틱한 풍모로 인해 영화의 주제가 같은 아니,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곡이다.

⑦Fragilidad (연약)- 시작부터 어디서 많이 듣던 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스팅의 곡을 번안한 곡이라고 한다.(스팅의 FRAGILE) 그녀의 시적 운치는 연약하면서도 은은한 향기를 뿜어준다. 맑은 그녀의 시각과 우수어린 표현은 낙엽이 떨어진 후 혹은 쌓인 눈이 죄다 녹아버린 거리를 밟는 듯한 외로움에 젖게된다. 그러나 소사가 이야기하는 그 외로움은 오히려 감미롭게 역미화될 것 같기도 하다.

⑧Por Un Solo Gesto De Amor (사랑의 유일한 몸짓을 위해) - 그녀의 진지한 호소력은 자신과 현실적 환경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고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어진다.

⑨Caseron De Tejas (기와집)- 감성적인, 마치 클래식의 선율을 연상시키는 피아노 인트로가 지난 후 다소 재즈 같은 느낌으로 바뀐다. 후반에는 기타의 투명함이 첨가되며, 이런 연유로 소사의 호소력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⑩De Alguna Manera (상당한 능란)- 서서히 떠오르는 기억들... 소중했던 인생의 단편들을 재생시켜주는 진실 어린 목소리를 들어 보자. 스페인어는 잘 모르지만, 운율은 만국 공통인 것 같다. 부드러운 운율의, 들으면 옛 추억이 생각나는 한편의 시.

⑪Vuelvo Al Sur (남쪽으로의 회귀)- 남성의 음성을 처음부분에 삽입하고 바람결같은 아코디언의 비애속에 읊조리는 소사의 고운 선율이 그리고 흐르는 물결처럼 애잔한 감동을 전해준다.

⑫Pescadores De Mi Rio (나의 강의 어부)- 물흐르는 소리를 곡 중간 중간 넣고 있고 통찰력있는 그녀의 목소리 또한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는 듯 하다.

⑬Estas A las Nuevas (새로운 존재)- 황량한 대지의 끝에서 들려오는 극도의 슬픔이 배어있는 마법적인 신비의 악기 팬풀룻은 민속음악적인 시도와 함께 어느새 속세의 번민들을 잊어버릴 정도로 경쾌한 음악으로 변모한다. 첫부분이 너무좋아 계속듣게 하는 곡.

⑭Palabras Para Julia (훌리아를 위한 자장가)- 피아노의 서정적인 인트로, 일률적인 생활에 찌든 우리의 가슴을 순화시키는 소사의 못소리가 등장할 즈음 항상 답답했던 긴장과 옹어리는 허물어지고 만다. 잔잔한 기타의 아르페지오가 이를 이어받고, 그후 첼로와 피아노와 오케스트레이션이 그녀의 목소리와 어우러지면서 이슬맺힌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스페인 최고의 음유시인 paco ibanez가 작곡하고 작시가 josé agustín goytisolo가 시를 붙인 스페인 포크의 최고명작중 하나이다.

⑮Vidala De La Soledad (외로움의 단가)- 외로히 그녀의 생을 달래는 연가가 들려 온다. 하염없이... 자신을 위안하는 독백은 오히려 삶에 대한 경건함과 진지한 자세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듯 하다. 외로움을 훌훌 털어버리는 추임새가 마지막으로 우리의 가슴에 아름다운 고통을 심어준다.

가난한 민중의 정신적 지주, 메르세데스 소사!

소사가 노래하는 사랑과 평화의 메세지는 앞으로도 상처받는 영혼들을 어루만져주며, 세상만사의 갈등과 허황된 욕망을 깨끗이 씻어주리라 믿는다. 그녀가 세계적으로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연주력이나 작곡력과 같은 음악의 단편적인 요소가 특출했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 인간과 삶을 사랑하는 '휴머니티'였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류애가 녹아있는 그녀의 노랫말은 지구상에 단 하나 존재하는 그녀의 것이다. 70를 바라보는 그녀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할 수 있길 바란다.

출처:http://myhome.hanafos.com/~letras/musica/sosa.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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