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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9월 11일 오전 칠레 산티아고, 대통령 경호대와 쿠데타군 사이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쿠데타군의 탱크와 장갑차가 시내 중심지를 장악했다. 공중에서는 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대통령궁을 포격하고 있었다. 이 날 군부와 경찰의 연합 쿠데타로 당시 대통령 아옌데(Salvador Aellende)는 대통령궁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사망했다. 이렇듯 칠레 국민의 지지로 달성된 사회주의 정부는 3년도 못 넘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 날 저녁, 쿠데타 세력의 성명서 골자는 막시스트가 망쳐 논 나라를 재건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정치적 격변기에 칠레 대중의 인기를 모았던 한 명의 가수가 있었다. 게바라(Ernesto Che Guevara)가 67년 볼리비아 산지에서 군 장교에게 총살당한 것처럼 빅토르 하라(Victor Jara)도 73년 칠레 쿠데타 발발 사흘 후 칠레 스타디움에서 그렇게 죽었다.


60년대 미국 히피 노래문화가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로 저항성을 강조했다면, 당시 칠레는 정치적 상황에 더욱 민감했다. 그것은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제 3세계로서의 공통된 반응이기도 했다.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 이후 제3세계에 대한 전략, 즉 반공 이데올로기는 쿠데타 정부마저 지원하는 좀 더 우회적 방식으로 차원을 바꾼다. 이 같은 정세 속에서 칠레에선 이른바 억압받는 민중의 해방을 노래한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 즉 '새로운 노래'라는 노래를 무기로 상업문화의 침공에 대항해 투쟁한 혁명적 운동이 등장했던 것이다. 히피의 '프로테스트 송'이 목가적 서정이나 반문명, 기성 질서에 대한 문화적 저항이었다면 칠레의 누에바 깐시온은 제 3세계 좌파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예술가 뿐만 아니라 지식인, 학생, 노동자가 연대해 직접 정치적 개혁작업에 참여한 실천적 저항이었다. 또한 이 노래운동은 미국 대중문화의 상업적 침투에 대한 반발과 민족문화에 대한 발굴과 재현에 힘쓰면서 하나의 문화운동으로 결정된 것이다.

대표적인 가수와 그룹은 누에바 깐시온의 선구자 비올레따 빠라(Violeta Parra), 그룹 인띠 이이마니(Inti Illimani), 그룹 낄라빠윤(Quilapay n), 앙헬 빠라( ngel Parra) 등이 있었다. 더불어 누에바 깐시온은 일련의 문화운동과 결합돼 가까이 페루와 볼리비아를 비롯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등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연대성을 형성하며 문화혁명으로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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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토르 하라(Victor Jara, 1935.9.28 -1973.9.14)는 칠레 산티아고 부근의 한 빈민지구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소년기는 아버지의 거친 손버릇과 술주정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따스한 보살핌 속에서 무사히 정규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이 때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Te recuerdo Amanda (너를 기억해, 아만다)'란 노래로 발표되었다.) 청년시절 칠레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였고, 비올레따 빠라를 만나면서 칠레의 민족문화와 민족의식에 대해 본격적으로 눈뜨게 되었다.


하지만 60년대 당시까지만 해도 연극연출에 전념했지 가수는 아니었다. 가수의 길로 접어든 것은 1969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제1회 누에바 깐시온 페스티벌에서 자작곡 'Plegara a un laborador(한 노동자에게 바치는 기도)'가 공동우승을 차지하면서부터이다. 이 때부터 오직 가수로서 새로운 노래운동세력과 함께 칠레의 가난하고 소외된 대중을 위해 노래하였다. 그의 민중을 향한 사랑과 조국 칠레의 민중혁명정부에 대한 열망은 국민 대다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이후 73년 쿠데타까지 약 1,000일간 민중가수로서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연합의 문화사절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민선 사회주의 정부의 탄생에도 불구하고 혁명 실천은 군부와 권력에서 밀려난기민당 우익진영의 보수세력, 과거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대자본가와 지주, 거기다 의사와 엔지니어와 같은 전문직 중상층의 지지가 합쳐져 큰 장애물에 번번이 부딪힌다. 하라 또한 반정부 세력에게 테러의 표적이 돼 목숨의 위협까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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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하라의 노래 가운데 혁명성을 고취하려고 만든 교조적인 노래는 단 한 곡도 없다. 그는 고국의 민요를 채록하여 불렀고 대체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구전되는 민속음악에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비올레따 빠라나 하라가 주력한 부분도 안데스 폴크로레(Folklore)였다. 그들의 혈통엔 인디오의 피가 흘렀고 민족적 정체성을 께추아(Quechua)족이나 마뿌체(Mapuche)족의 전통문화에서 찾았다. 또한 게바라에게 바치는 노래 체를 위한 삼바(Zamba Del "Che")와 유령(El aparecido)처럼 민중의 고통을 고발하였고, 네루다(Pablo Neruda)의 시 '오늘도 그렇게 그들은 흑인들을 죽이네(Asi como hoy matan negros)', '사랑이란 갑자기 나타나는 길(El amor es un camino que de repente aparece)', '15번째 시(Poema 15)', '난 여기에 남아있네(Aqui me quedo)', '무서운 사냥개는 이미 떠났네(Ya parte el galgo terrible)' 등에 곡을 붙여 불렀고 스페인 내전 때 프랑코의 감옥에서 숨진 미겔 에르난데스(Miguel Hernandez)의 시 'Vientos del Pueblo(민중의 바람)'을 노랫말로 곡을 만들어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을 고무시켰다.
비록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비운의 생애였지만 빅토르 하라는 라틴아메리카 전 민중에 대한 현실을 노래한 따뜻한 혁명가수였다.


동국대학교 대학원 신문 2001년 11월호 16면 <문화산책>


전주부분에 흐르는 곡은 빅토르 하라의 La Partida(조국) 그리고 아옌데궁의 폭격소리와 총성속에 울려퍼지는 노래는 Violeta Parra음성의  Gracias a la vida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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