낄라빠윤(Quilapayun)

낄라빠윤은 1965년 세 명의 젊은 학생 훌리오 까라스꼬(Julio Carrasco), 에두아르도 까라스꼬(Eduardo Carrasco), 훌리오 눔와세르(Julio Numhauser), 빠뜨리시오 까스띠요(Patricio Castillo) 등이 모여 만든 새로운 노래를 표방한 그룹으로 탄생하였다.

우리 말로는 '세 개의 턱수염'이란 뜻이라는데  이 이름을 짓게 된 이유는 결성 당시 3명의 멤버가 모두 체 게바라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턱수염을 길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대 의상도 항상 저항을 상징하는 검은 색의 옷을 입는 이들은 인티 이이마니처럼 역사 속의 칠레를 투쟁하는 민중들이 주인이 되는 현실로 바꾸기 위해 음악으로 싸웠던 사람들이다.
낄라빠윤은 본격적인 활동은 볼리비아의 라우로 축제와 아르헨티나의 꼬스킨Cosquin 축제와 더불어 신인 가수와 연주자들의 등용문인 비냐 델 마르 Viña del Mar 국제 가요제를 통해 시작하였다



데뷔앨범은 비올레따의 아들 앙헬 빠라(Angel Parra)와의 협업으로 노래를 만들어나갔다. 이후 2집부터 빅토르 하라가 음악감독 격으로 참여하며 공동작업을 진행하였고, 음반은 1973년 9월 군부 연합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오데온(ODEON)레이블 을 통해 제작한다.

이 그룹은 멤버들은 모두 공산주의 청년회(Juventud Comunista) 출신으로 누에바 깐시온을 대표하는 세 그룹 가운데 가장 정치적인 메시지를 강조한 노래를 불렀다.

포클로레에 기초한 중창의 하모니 위에 남미 원주민 문화의 가치를 옹호하고 도시 노동계급의 문제, 민중의 투쟁사 등을 노랫말로 표출하였고, 세계 여러 나라의 저항 가요를 소개하는데 주력했고, 라틴 아메리카의 연대의식을 북돋는 노래들을 많이 불렀다. 이른바 안데스 음악(Andean Music)과 누에바 깐시온의 기수가 되었다.

한 예술가의 천재성과 셀 수 없는 노고의 결과 빛나는 예술 작품이 탄생한다. 물론 해당 작품의 위대성을 판가름하는 시대는 당대가 될 수도 있고 작가 사후 훨씬 뒤일 수도 있다. 음악도 작곡가와 작품을 하나로 묶어 갖은 수식어-비루투오소, 거장, 카리스마적, 전설적 따위-붙이면서 예술지상주의의 가치를 드높인다.

그런데 작곡가나 연주자, 가수보다 노래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힘이 될 때가 있다. 대부분의 혁명의 노래가 그러했듯,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노래 자체가 거대한 파고가 되어 시대를 풍미했었다. 이 때의 노래는 민중이 함께 뭉치는 강한 연대의 끈이며 해방의 길을 열어주는 힘의 울림이었을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역시 쿠데타와 反혁명을 거듭하며 불안한 정치적 국면을 이어왔고 절대다수의 국민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제구조가 쉽게 바뀌진 않고 있다. 오늘 소개하는 낄라빠윤은 1970년대 초반 칠레 인민연합의 선전밴드라고 할만큼 혁명성을 고취하는 누에바 깐시온의 대표적 음악단체였다. 

<연보>

1965년 칠레 발빠라이소의 칠레대학 학생들이던 훌리오 눔아세르(Julio Numhaser), 훌리오 까라스꼬(Julio Carrrasco), 에두아르도 까라스꼬(Eduardo Carrasco)등이 모여 그룹 결성.

1966년 제1회 칠레민속음악 축제에 참가하여 1등을 하게되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
1967년 앙헬 빠라(Angel Parra 비올레따 빠라의 아들)의 지도 아래 첫 번째 음반을 발표
1968년 공산주의 청년단체에 들어가서 민중 투쟁, 노동 운동등 인민들을 위한 저항 음악과 안데스 민속음악을 노래하면서 칠레 누에바 깐숀을 하게되었고 빅또르 하라의 음악감독으로 "Por Vietnam" 음반을 발표
1969년 빅또르 하라와 헤어지고 1970년 첫 번째 유럽과 쿠바에서 공연
1973년 유럽공연 중 파리에서 피노체가 이끄는 군사 쿠테타 소식을 듣고 그 곳에서 머물면서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음악을 노래
1974년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대표적인 음반인 "El Publo unido jamas sera vencido"를 파리에서 발표하고 연이어 1975년 "Adelante"(앞으로), 1976년 "La Patria"(조국)을 발표
1970년대 중반까지 비올레따 빠라, 빅또르 하라등 칠레 누에바 깐숀의 선구자들의 음악과 빠블로 네루다의 시를 가사로 사용한 음악을 발표하면서 칠레 누에바 깐숀의 대표주자였던 이들은 중,후반부터 새로운 음악인들이 합류하여 다양한 중남미 음악을 하면서 음악의 폭이 넓어지고 거의 매년마다 음반을 발표하였다.
1983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공연을 하였고 빠블로 네루다 사망 10년을 맞이하여 "Chante Nuruda"를 발표
1987년까지 파리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1988년 피노체 군사정권이 아옌데 전 대통령의 장례식을 허용하면서 화해정책을 펼치자 칠레로 돌아와 1989년 칠레순회공연을 하고 "Quilapayun en chile"음반을 발표하고 계속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1992년 "Latitudes"음반을 파리에서 발표하였고,
1998년 칠레에서 2장짜리 편집 앨범 "Antologia"(1968 - 1992)를 발표하였다.
1999년 파리에서 "Al Horizonte"를 발표하였고
2000년 "Quilapayun 35년" 편집 앨범등 현재까지 약 30여개의 음반을 발표하였다. 

<이상 출처:http://www.icomn.net/>




흐르는 곡은 낄라빠윤의 Mi patria (나의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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