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스 테오도라키스.

그는 1925년 영화 <희랍인 조르바>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크레

사용자 삽입 이미지
타섬에서 태어났다.
학생시절 나치 점령군에 항거하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죄로 처음 체포됐고 독립과 시민 전쟁을 겪으면서 그는 또다시 체포되는데 이번에는 군부에 의해서였고 그로 인해 한 섬의 감옥에 수감된다.

출옥 후 그는 파리로 떠나 파리 음악원에 입학함으로써 아테네에서 못 다한 음악 공부를 계속하게 된다.

그는 1953년부터 1960년까지 파리에서 살면서 교향악,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모음곡, 발레곡 등의 클래식 곡들을 작곡하였다.

1960년에는 그리스로 귀국하여 부주키, 산두리와 같은 민속악기들을 포함시킨 민속 오케스트라 "Athens Little Symphony Orchestra of Piraeus"를 조직하고 그리스 대중 음악 안에서 새로운 운동을 전개시키기 시작하였다. 전통 민속 음악의 비잔틴 뿌리를 묘사하고 그리스 현대 음악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하고 있는 그의 작품은 정부의 통제를 받는 방송에선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작부터 대중들로부터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그는 또한 수많은 강연, 세미나, 기고 등을 통해 예술과 그리스 사회의 문제점 사이의 연관성으로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 내기 위해 애썼다. 1963년 테오도라키스는 "Lambraskis Democratic Youth"라는 정치 단체를 결성하였다. ( 이 이름은 그 해 암살 당한 좌익 총부의 이름을 딴 것이며 그의 이야기는 영화 "Z"로 만들어졌다. )

1964년엔 그 자신이 좌익 총수가 되어 1967년 군부 쿠테타로 인해 강제로 물러나기까지 자리를 지켰다. 몇 달 후 그는 체포되어 악명 높은 부블리나스 경찰서에서 고문 받은 후 투옥되었다. 그가 풀려난 것은 1968년이었는데 그 몇 달 후 다시 체포되어 한 벽촌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감옥으로 보내졌다.

그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고 국제 사회의 압력을 받게 된 군부는 1970년 해외 추방이라는 단서를 달아 그를 석방하였다.

하지만 그가 추방된지 석달만에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그리스인들의 도움으로 런던의 로얄 페스티발에서 감동적인 콘서트를 열 수 있었고 그리스 여가수인 마리아 파란두리와 함께 전세계를 돌면서 조국의 민주화를 기원했다.

결국 군사정권의 붕괴로 그의 험난했던 자유 투쟁은 드디어 막을 고했고 1974년 그토록 염원했던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으니 생각해보면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음악 여정 자체가 그리스 역사의 수레바퀴가 아닌지....

그렇듯 폭력과 억압의 그림자로 어두웠던 그리스 역사의 한복판에서 자유의 메아리로 그리스인의 영혼을 단결시켰던 산 증인인 셈이다.


AND